​마을을 움직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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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와동, 들꽃피네 사회적협동조합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전하고,

랑을 전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 행복과 사랑을 돌려주면

그게 삶의 존재 이유가 된다는 생각입니다.

Q. 안산과 와동에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살게 되었나요?

경동교회에 부목사로 목회 일을 하고 있다가 2006년 ‘들꽃피는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안산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들꽃피는학교는 1988년도에 김현수 목사가 첫 교장을 맡으며 시작되었고, 2006년 6월부터 제 가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와서 청소년들의 현실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친구들과 같이 살 기도 했는데 그 아이들을 통해 모르는 세계를 알아가면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거주한 것은 2006년부터였지만 1986년 노동야학을 하러 처음 안산에 왔고, 1988년까지 노동 상담소에서 일을 했어요. 그 이후에도 들꽃피는학교 이사로 안산을 자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산은 제게 익숙한 곳이었고, 그때 당시 안산은 공단 도시, 가난한 노동자가 많은 곳, 원주민보다 외지에서 이주한 사람이 많은 곳이라는 인상이 있었습니다.

 


Q. 마을에서 어떤 활동을 주로 하시나요?

들꽃피네 사회적협동조합은 자립을 준비하는 청소년의 건강한 자립을 위해 존재하는 곳입니다. 저는 그곳 의 이사장으로 교육, 영업, 조직관리, 마케팅 등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사회적 관계도 하고 있습니다.

     들꽃청소년세상은 서울, 경기, 군산에 이렇게 세 도시에 있는데 경기도는 제가 대표로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위기 가정 청소년들, 쉼터,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올 2월에 들꽃 피네 사회적협동조합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이유로 들꽃청소년세상 대표는 사임했습니다. 하지만 상임이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아직 같이 일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들꽃청소년세상과 들꽃피는학교 일보다는 들꽃 피네 사회적협동조합 일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들꽃청소년세상 사단법인에 속해 있는 들꽃피는학 교는 미인가 도시형 대안학교입니다.

     들꽃피는 학교는 학교 밖 청소년들, 학교를 여러 가지 이유로 떠나게 된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입니다. 평화교육, 행복교과, 검정고시, 여행수업, 진로 찾기 등을 콘텐츠로 하는 학교로 25년 동안 지역사회에서 성실히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더 이상 학교에 오질 않고 있습니다. 이유의 핵심은 청소년들이 이제는 돈을 벌러 가느라 학교에 오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6년 전 우리 학교에서 들꽃 피네 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청소년들의 니즈(needs)가 졸업장보다는 지금 돈을 벌고 이후에 자기 삶을 준비하는 자립에 맞춰져 있어요. 그렇다면 그 들에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서 일자리를 주고 진로와 자립에 대한 교육을 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 각했습니다. 바리스타 수업이나 진로 찾기, 인턴쉽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때마다 원하는 친구들이 찾아옵니다. 저는 그런 곳이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9명의 친구들이 수업을 받고 있고, 4명의 친구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6년 동안 40명의 친구들이 다녀갔습니다.

Q. 어떤 계기로 마을 활동을 하게 되셨습니까?

제가 처음 야학을 하던 시기에는 마을 활동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지역 운동으로 시작했어요. 마을이라고 하는 곳은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는 여러 조건에 처해 있는 사람들, 위기에 처해 있는, 혹은 경제적 어려움 등 여러 가지 문제에 처한 사람이 많이 있어요. 공동체 안에서는 아파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고,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이 옆에 있는데 그 공동체가 아프지 않은 척을 할 수가 없습니다.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했고, 그 당시에는 노동자들을 위해서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리고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밥은 혼자 먹어도 굶는 사람을 옆에 두고 밥을 먹을 수 없다.’가 제 생각이고, 행복과 평화는 기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행복을 위해서는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시켜야 우리 사회가 행복해져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라고 하는 것은 가정, 지역, 마을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혼자만의 행복이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내 행복을 위해서라도 옆 사람의 행복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제 소신입니다.

Q. 마을 활동을 하면서 즐겁고 보람된 일은 무엇인가요?

여러 가지 이유로 중학교 때 학교를 떠난 친구가 고2 때까지 거리 생활을 했고, 고3 때 거리에서 만난 언니의 부탁과 권유로 600만 원 소액대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돈을 언니에게 입금하자 언니란 친구는 사라 졌습니다. 거리 생활을 하면서 수입은 없고, 지식은 짧고, 세상 물정은 모르는 19세 청소년이 졸지에 신용 불량자가 되어버렸어요. 작업 대출이라고 청년들사이에 서 유행하고 있습니다. 빚은 이자 때문에 800만원으로 늘어나고, 완전히 어려운 처지가 되었죠. 그러다 20살에 여기에 와서 기관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3년 반 근무해서 빚을 다 갚고 9월 말에 그만두었습니 다. 지금은 나라에서 받는 청년 전세대출로 집을 구했고, 제과제빵을 배우고 싶다고 하며 이곳을 떠났어요. 이런 이유들로 이곳이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지역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어요. 4.16 재단 이사, 안산시마을만들기지원센터 운영위원, 지속가능사회협의회에서도 일을 하고 있어요. 모두 제 신념에 따라 일을 하는 것입니다. 6년 동안 열심히 한 일이 4.16 관련 일입니다. 억울함과 비통함의 유가족 옆에 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분들의 고마움에 내가 힘을 내고, 그런 상호작용을 통해서 보람을 느낍니다.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전하고, 사랑을 전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 행복과 사랑을 돌려주면 그게 삶의 존재 이유가 된다는 생각입니다.

Q. 마을 활동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사람이 생각을 나누다 보면 충돌하게 됩니다. 마을에서는 생각과 생각을 나누는 과정이 필연적인데 때로는 소모적이고, 감정적이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정말 안타까워요. 생명안전 공원을 추진할 때 그런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이 너무 거칠게 의견을 내세우니까 설득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어요. 반대 측이 아닌 우리 안에서도 생각과 생각을 나누는 것에서 충돌이 있고, 크게는 서로를 반목하게 되고, 감정적으로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을 운동이 생각을 나누는 것 보다 마을이라는 공동의 가치를 바라보는 마음을 나누는 일들이 병행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갈등들이 하나의 마음이 되고 서로의 생각이 합 쳐지는 과정으로만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결과가 되고, 그 결과가 서로 반목하게 되는 과정이 되어서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Q. 마을만들기 활동이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요?

겸손해졌습니다. 전에는 내 생각이 옳고, 내 지식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 때가 있었어요. 그러나 마을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청소년들을 만나게 되면서 내가 옳다는 것은 교만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생명을 가진 것은 모두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존중해주어야 하고, 내 것을 강요하고 주입시키는 것은 안 되겠다는 것을 알 게 됐었습니다. 아직도 교만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겸손하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알게 되고, 사람의 존엄,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인권이라고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전에 하던 일이 목사로 남을 많이 가르치려고 했고, 훈계하고, 계몽하는 삶이었습니다.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생각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청소년을 위한 일을 하게 되었어요. 목회가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람의 겉만 번지르르하게 어루만지는 것이 목회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더 이상 그런 삶은 그만 살고 싶어서 마흔 살 중반에 마을의 현장 일에 뛰어들어 15년 정도 일을 했고, 나중에 60대가 되면 목회를 다시 해야겠다고 계획했습니다. 자신할 수는 없지만, 이후에 목회 활동을 할 수 있겠다는 마음과 용기를 하나님이 주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Q. 나의 활동으로 마을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학생이 많을 때는 들꽃피는학교에 30~40명씩 다녔습니다. 그런 친구들이 어느 날 안보이기 시작했습니다. 6~7년 전부터 청소년들의 생태계가 바뀌어 갔어요. 이전에는 임금도 낮고, 자리도 없어서 청소년들이 돈을 벌 수가 없는 환경이었어요. 그러다 7~8년부터 편의점, pc방, 노래방 등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많이 생겨나고 그곳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청소년들이 메꾸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돈을 벌러 갈 데가 없을 때는 학교에 나오고, 돈을 벌러 갈 곳이 생기면 안 나오는, 청소년의 생태시장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게임을 하려고 pc방에 가는 학생들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pc방이라도 나와야 집 밖을 나오고 내가 찾아가 학교 밖 친구들을 만나기 쉬웠는데, 이제는 친구들을 만날 기회들이 많이 줄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학교의 수명이 다 되었다고 느꼈고, 이제 이곳이 학교가 아니라 일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 수 있는, 그리고 돈을 주는 그런 곳을 만들었습니다. 들꽃 피는 학교 도서실을 카페로 개조했는데 딱 맞더라고요. 장사가 잘 돼서 이익이 많이 나와야 아이들한테 일자리를 많이 줄 수 있으니까 영업을 하고 다녔어요. 들꽃피는 학교가 들꽃피네로 이동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학교에 아이들을 모집하지 않았습니다. 검정고시가 두 번인데 4월, 8월 시험이 끝나면 학교에 아무도 안 나와요. 교사들도 힘이 빠지고, 검정고시는 학원에서 더 교육을 잘한다고 인정하게 되더라고요. 학교에 학생들을 모집하는 것은 자생성, 야생성을 갉아먹는 행위가 될 수 있겠다 해서 더 이상 학생을 모집하지 않고 있습니다. 들꽃피는학교가 20년 넘게 오면서 굉장히 큰 변화를 겪었고, 변화의 한 가운데 청소년들의 사회 생태계, 니즈(needs)의 변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들꽃피네가 더 중요한 학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교장으로서의 책임입니다. 들꽃피는학교의 성격 변화와 미래 방향성에 대한 정립들은 내가 있는 동안에 진행되었습니다.

     ‘들꽃피네’에서 들꽃은 학교 밖 청소년들을 의미합 니다. 지금은 학교와 사회가 공부 잘하는, 좋은 대학으로 진학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많은 청소년들이 들판의 꽃처럼 많이 있어요. 그들의 그런 야생성과 생명성을 우리가 봐주고 북돋아 주어야겠다는 의미로 ‘피네’입니다. 또한 FINE으로 좋다는 의미의 중의적인 뜻이기도 합니다. 모든 청소년 들이 FINE하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며 직접 지은 이름 입니다. 이제 들꽃피는 학교가 들꽃피네 학교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8월부터 토요일마다 더 테이블 성장 학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8명이 바리스타 교육을 받고, 개별적으로 진로찾기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학교라고 합니다. 학교는 건물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 배우는 사람 그리고 공동의 프로그램이 있으면 그것이 학교라고 정의합니다. 더 이상 교과, 순서 그런 것이 학교가 아닙니다. 2년 동안에 우리의 자생성과 사업의 윤리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앞으로의 활동계획은 무엇인가요?

이곳에서 바리스타 교육을 받는 친구들은 개인마다 배우는 기간도 다르고, 현장에 투입을 위해 배우기도 하지만 배움으로 끝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들에게 자격증까지 발급 할 수 있도록 발급 기관을 신청하려고 합니다. 사실 바리스타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인 진로의 영역일 뿐이에 요. 청소년들은 자립, 진로라고 하는 키워드를 가지고 많은 고민을 합니다. 바리스타라는 기술을 교육하기보다는 이들이 진로와 자립이라는 키워드에서 슬기롭게 살아가는 삶의 능력을 배우게 하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공동체성을 배우게 하고 싶어요. 내가 이 지역과 사회에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서로 기대고, 서로 나누고, 북돋우면서 산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저희가 가지고 있는 교육의 철학입니다. 그리고, 그 철학을 알려주는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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