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움직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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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길

본오3동, 본오3동 주민자치위원회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마을 활동으로 주민들이 행복해하면

도 더욱 큰 보람을 느끼게 됐어요.

Q. 안산과 본오3동에 어떤 계기로 살게 되었나요?

1992년에 월피동에 라이프 백화점을 신축하게 되었 어요. 안산 라이프백화점 오픈 프로젝트팀에 스카우트되어서 층장으로 근무하게 됐어요. 당시 집이 부평 계산동이었는데 직장 따라서 안산에 오게 된 거죠. 그런데 라이프백화점이 오픈 6개월 만에 부도가 나서 다농 마트로 이름이 바뀌면서 그만두게 되었어요. 저는 이미 이사는 왔고요. 그 이후 28년 살 게 됐네요. 이사 와서 본오3동 장수마을 한 집에서 96년부터 13년 살았어요. 그렇게 오래 살긴 쉽지 않을 거예요. 지금도 본오 3동 상록수역 앞 주공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Q. 마을에서 주로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96년 여름부터 안산시자율방범대 상록수지대 대원으로 야간에 청소년 선도 및 우범지역 순찰 활동과 범죄 예방 활동을 현재까지 하고 있어요.

     그때 당시에는 안산에 와서 친인척도 없고 동네 사 람과 형님, 동생 하며 지내는 거죠. 그때 당시 방범대 가 사랑방 개념이었어요. 매일 안 나가면 동네일이 궁금했어요. 형님들과 동생들과 막걸리 한잔하면서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곤 했어요.

     방범대 활동이 단순한 것 같아도 범죄 심리가 그래요. 경광등 켜고 돌아다니면 범죄 예방 효과가 있어요. 요즘 청소년들은 10시면 귀가하잖아요? 청소년들 귀가 활동, 계도 활동, 취해서 쓰러져 있는 주취자들 신고 들어오면 귀가시켜주고 12시 넘어서는 여성 안심 귀가 서비스도 했어요. 물론 지금은 안 하고요. 제가 대장으로 활동했던 2008, 2009년에는 상록수역에서 사동, 사이동, 본오2동까지 안심귀가 서비스를 했었죠.

     현재는 방범대도 바뀌었어요. 자기 근무 날만 나가죠. 시대가 지나면서 개인주의가 팽배하니 대원들 모집이 힘들어요. 남성 대원이 많지 않으니 여성 대원을 충원해서 합동 근무를 해요. 남성, 여성 대원과 함께 근무하도록 환경이 바뀐 거죠.

     그리고 사동에 주민자치위원으로 들어가게 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사동 동장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적십자회비 이야기가 나와서 기부했더니 “사장님 같은 분이 동네 활동을 해야 한다.”며 권유 하셔서 주민자치위원회 활동을 하게 된 거예요. 주민 자치위원일 때는 회의 시간에만 참석하고 적응 기간도 필요했죠. 처음 위원으로 있을 때는 잘 모르니까 회의 있다 하면 가서 밥 먹고 술 먹고 놀다 왔어요. 분과장일 때는 ‘뭔가 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술을 줄이고 분과원과 자주 모였어요. 그렇게 3~4개월 모여서 분과 회원들과 다른 동 복지 활동에 관심을 갖고 찾아 보게 된 거죠. 주민자치 관련 업무를 하는 계장님의 도움을 받아 복지 관련 다른 지역 자료를 취합하고 우리 동 복지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그게 재밌더라고요. 그 때 바로 ‘주민자치가 이런 거구나.’라고 느꼈어요. 그러다보니 사동 주민자치위원장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습니다.

     사동 주민자치위원장 임기를 마치고 우연한 기회에 본오3동 주민자치 활동을 하게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인적 쇄신 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재 본오3동은 적극적이고 활동적이고 주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주민자치위원회로 변화되어 있어요. 본오3동 주민자치위원장 활동을 하면서 동 사업을 추진하려고 본오공원 사업, 샘골로 상인회를 구성해서 도로 정비사업 추진하고 있고요. 시 의회와 협의 중입니다.

     저는 원래 활동을 좋아해요. 외향적인 성격이라 선 후배들, 사람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했고요. 성격으로 세상 산다고 활동하게 되더라구요.

Q. 어떤 계기로 마을 활동을 하게 되었나요?

본오3동에 계속 살게 된 계기가 있는데 그 일로 인해 마을 활동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도 되었어요. 밤 9 시쯤 밖에서 큰 소리가 나더라고요. 내려가 봤더니 동네 어르신이 담배를 피우는 동네 아이들에게 훈계하다가 마침 그 상황을 지나가던 애 아빠가 발견하고 큰 소리를 내며 싸움이 된 거죠. 그래서 방범대에서 출동을 했더라고요. 가만히 모습을 지켜보니까 방범대에서 중재를 잘하더라고요. 그래서 방범대 한 분에게 “아저씨 거기 뭐하는데요?” 하고 물어보니 회비 만 원씩 내며 하는 봉사활동 단체더라고요. 그렇게 1996년 4월에 방범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방범대 활동하며 동네 사람을 알게 되고 함께 활동하다 보니 13년을 살게 되었어요. 물론 지금도 하고 있죠.

     성격적으로 역마살이 꼈다고 할까요? 누군가를 만 나야 하고, 무언가 일을 해야만 하는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지금 사업장을 함께 운영하는 아내에게 듣는 이야기가 “밖에서 듣는 이야기처럼 회사일 좀 해라.” 입니다. 제가 방범대 대장하면서 ‘대장 아내는 대원으로 들어온다.’ 라는 조항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집사람 이 대원 활동을 하게 됐어요. 그 이후로는 집사람이 활동하는 부분에 대해 제약을 두지 않아요. 주민자치위원회위원장을 한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 않아요. 그냥 적당히 하라는 말은 했죠.

Q. 마을 활동을 하면서 즐겁고 보람된 일은 무엇인가요?

동을 위해 봉사하고, 내 역할이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어떤 보람도 없이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주민자치위원장을 사동도 했고, 본오3동도 하고 있지만 ‘주민과 동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뭔가 없을까?’라는 고민을 늘 해요. 다른 주민자치 위원장님들은 모르겠지만 저는 5일 중 4~5일을 동장님 얼굴보고 차 한잔합니다.

     안산시자율방범대 상록수지대에서 대원들과 함께 밤 9시에 모여 야간 순찰활동을 하면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가출한 청소년들이 길거리에서 술에 취해 오갈데 없는 걸 보고 설득하여 무사히 귀가시킨 일이라 든지, 추운 겨울에 취객들이 길거리에 쓰러져 동사 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무사 귀가 시킨 일도 있었어요. 나로 인해 청소년들이 나쁜 길로 가지 않도록 하고, 쓰러진 주취자들이 범죄에 노출되기 전에 미리 예방할 수 있는 게 좋았어요. 그리고 주민자치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주민 요청사항을 행정과 협의해서 지원해준 것이 보람됐던 것 같아요.

 

Q. 마을 활동을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구성원간의 편 가르기가 힘들었어요. 사람이 2~4명만 되어도 편 가르기를 해요. 네 편, 내 편을 나누는 이런 것들이 마을 활동을 하면서 안타까웠어요. 서로가 터 놓고 이야기하면 하나가 될 수 있는데, 사소한 오해로 ‘내가 옳니 네가 옳니’ 싸우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 다는 거죠. 그건 없어져야할 폐단이라는 생각이 들어 요.

     상록수지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대원들 간의 갈등으로 타협하지 않고 끝을 본 후 한 그룹이 다 같이 그만두는 상황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송년회 날, 대원들 간에 사소한 다툼으로 한 대원이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 대원이 청와대 민원을 제기하여 안산시자율 방범대 전체가 비난에 대상이 되었을 때 제일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인적 쇄신’도 “얘는 무조건 안돼.”와 같은 개인 감정에 의한 편 가르기 때문에 해야만 했죠. 정말 동을 위해, 주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편 가르기 하지 않아요. 감투만 쓰고 있을 사람들, 자기 는 일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하는 것처럼 포장을 하는 사람들이 편 가르기를 한다는 거죠.

     협업. 대화. 소통이 안 되면 모든 게 안 되는 거예요. 그런 걸 안고 가려고 하면 소통이 중요해요. 소통하면 서로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풀게 되고 하나가 되고 하는 것 같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 서로 소통이 없었기 때문에 대화할 기회가 없었던 거죠. 대화의 단절이 이러한 기회를 박탈한 거예요. 대화를 통해 같이 가고 ‘함께’ 라는 단어를 바로 이때 쓰게 되는 거죠. 단체간 문제는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동들도 안고 있을 거예요. 우리 동은 유관 단체와 문제가 있진 않아요. 주민자치위원회에서 먼저 베풀면 만사형통이에요. 내가 다가가고 베풀면 문제없어요. 사동에서도 유관기관과 잘 지냈어요. 폼 잡는다고, 선임단체라고 주민자치위원장이 그러면 안 돼요. 서로 인격체로서 동반자로서 가면 다 좋더라고요.

Q. 마을만들기 활동이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요?

인생 살면서 나 자신이 변한다는 게 계기가 없으면 힘들지 않을까요? 7~8년 전 큰 수술을 했는데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어요. 정말 23일 동안 물 한 모금도 못 먹 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삶에 대한 긍정과 부정, 죽음의 생사에서의 삶의 변화,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어요. 그래서 ‘죽으면 무일푼인데 뭐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렸을 까? 주변도 좀 돌아보지.’라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가족들에게도 내일의 태양은 어김없이 뜨지 만, 내일 눈을 못 뜰 수도 있으니 최선을 다하자.’라고 해요. 그러면서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해요. 마을 활동 하면서도 항상 내 행복과 보람을 느끼지만, 주민들이 행복해하면 내 가 더 행복해지는 거죠.

     마중물 사업할 때 200만 원짜리 사업이지만 어르신들이 같이 웃고 즐기고 하는 것에 행복해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닌 사업인데도 어르신들이 즐겁고 행복하고 우리를 기다려주는 보람이 있었죠. ‘짧지만 재미있고 즐겁게 살자.’ 저의 모토가 즐기는 인생이에요.

Q. 나의 활동으로 마을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어려운 질문인데요. 주민이 원하는 것을 할 때 좋아하는 주민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샘골로에 있는 샘골교회 계단 조성할 때 느낀 건데 이용하는 주민들은 행복하고 즐거워하지만 거기 거주하는 사람들은 소음공해에 시달린다는 거죠. 양면성이 있죠. 다 같이 만족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으니 잘 안 되더라고요. 샘골로도 상인회가 있었는데 현재는 없어요.

     샘골로 도로 정비사업을 하고 싶은데 협의체가 있어야 하잖아요. 협상 대상이 있어야 협조를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은데 상인회가 없어서 구성을 못 하고 있었죠. 지역 국회의원이 국비, 시비를 따와서 샘골로 도로정비사업을 하려고 해도 협상의 대상이 없다는 게 굉장히 안타까워요. 이러다 보면 의욕이 꺾이거든요. 1년이 지났고 2년째 접어들면서 어렵지만 어떻게든 풀어 가는 과정에 있어요. 동네에 변화가 감지되면서 상인회가 하나둘씩 구성되는 과정과 사람들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어렵거든요.

Q.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어떠신가요?

코로나가 없었으면 샘골로에 작은 음악회를 하려고 했어요. 샘골로 상인회 활성화를 위해서 하루 정도 차없는 거리 만들어서 분기별 작은 음악회를 만들어 소비자가 모일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코로나가 쉽게 종식 되진 않을 거예요. 상황에 맞춰서 음악회를 해야죠. 그러면 예전에 해왔던 방식대로 가야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주민과 상인회와 주민자치위원회가 하나가 되서 유관단체가 참여하는 음악회가 되길 바랍니다.

     현재 본오공원이 87억을 들여서 둘레길 조성사업 계획이 수립되고 있어요. 지금 용역이 나가 있거든요. 용역이 결정되면 둘레길 만들고 덧붙여서 본오공원을 테마공원으로 만들고 싶어요. 수종 개종은 안 되고 잡목 개종은 되더라고요. 잡목 개종으로 구절초 동산을 만들고 싶어요. 정읍에 구절초축제가 있어요. 해마다 10월에 굳이 정읍을 안가도 본오3동에 가면 구절초 축제를 볼 수 있는 거죠. 수원, 서울, 안양, 시흥, 광명 등 외부에서도 찾아오는 테마공원 조성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본오3동 위원장 재임 중 하고 싶은 제 목표입니다. 동장님과도 협의하는 과정 중이에요.

     안산시마을만들기지원센터가 주관해서 주민자치회 토론회를 했지만 2022년도에 전환이 됐을 때 25개 동 모두가 같이 주민자치회로 갈 수 있도록 저 스스로가 하나의 디딤돌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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